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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부터 받은 두가지 선물

작성자
최창균
작성일
2010-12-16
조회
330
[초청의 글; 서울공대(1999년 11월)에 게재된 것임]

제자로부터 받은 두가지 선물
최창균 (화공21회, 서울대 응용화학부[현재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10여년전부터, 여름이 시작되면 우리집 안방에는 강화도 화문석이 펼쳐진다. 동시에 채소와 경쟁하는 잡풀의 퇴출싸움을 시작한 지도 5년째이다.
  1980년대초 어느날 낯선 사람이 내 연구실에 들어와 강화도 화문석을 싼 값에 사라고 권하였다. 어머니께서 화문석 이 야 기를 하신 적이 있어서 귀가 솔깃하여, 집에 전화를 걸었다. 집사람이 화문석은 누런 빛을 띤다고 하여, 보니 누렇기에, 기쁜 마음으로 산 후 차가 있는 화학공학과 교수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려 이를 쉽게 집까지 날랐다. 집사람이 보더니 화문석이 아니라 풀섶이란다. 그래도 싫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가장으로서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다. 이는 그후 수년동안 여름에 거실에서 애용되었다.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예로,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의 이 야 기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서울대 졸업후, 한국과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연구소에서 근무한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제자가, 인사차 선물로, 강화도에서 화문석을 직접 사서 집에 가져온 것이다. 학점을 특별히 잘 주지도 않았고, 추천서를 특별히 잘 써서 보낸 것도 아닌데…….
  위의 제자가 서울대에 재학하고 있었을 때에도 학생시위, 즉 데모가 격심하였고 교수는 데모 예방차원의 학생지도에 시달렸다. 데모가 시작되면, 교직원은 밤늦게까지 대기상태로 있었고 학생해산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는 지목받는 지도학생을 보호차 장시간 내 방에 데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제적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데모가 격렬하여지면, 휴교가 되기도 하였다. 연구논문보다 학생지도상황이 중요한 보고사항이 된 적도 있었다. 속칭 미팅에도 지도교수가 참석하게 되어서, 나는 내 파 트 너로 어린 딸을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사제지간에 적지 않은 대화와 정이 오간 것은 사실이다. 또한 한 해에, 14명의 석사를 배출하기도 하였고 30명이 넘는 제자들의 유학추천서를 쓰기도 하였다. 나로서는 제자들이 잘 되도록 최선을 다 하였기 때문에 부담없는 화문석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심하게 학생들을 야단친 적도 적지 않아 한 졸업생으로부터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성탄절 카드를 받은 적도 있다. 나는 여전히 이 카드도 간직하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끝내면서 학생지도시간이 연구시간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가 생긴 이 해는 내가 서울대에 부임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연구면에서도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연구분야가 구태의연하고 연구비도 감소일로에 있어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닌 상태에 있다가 이제야 말많은 “BK-21 사업” 덕분으로 회생할 것 같다. 원님 덕에 나팔을 불게 되는 것인지. 사실은 이 사업이 채소와 곡물을 가꾸면서 내가 오랫만에 찾은 마음의 평화에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나는 1995년 5월5일부터 서울 근교의 밭에서 콩과 팥, 호박, 가지, 옥수수, 오이, 고추, 상추, 부추, 들깨, 아욱, 무우를 가꾸어 왔다. 밭의 주인은, 대학원생 시절에 연구비로 대학원생 간식용 냄비를 샀다가 나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은 바 있는, 내 지도학생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나에게는 시골이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미 대학교에서 학과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였고 정부산하 연구기자재관련 센터장도 한 바 있는, 이 제자가 밭을 소유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채소를 가꾸고 싶다고 말하였더니 흔쾌히 자기 밭을 가꾸라고 허락하여 주었다. 자진하여 바로 지주의 손자인 내가 제자의 소작인(?)이 된 것이다.
  4월에 밭갈이가 끝나면, 나는 밭에 남북으로 줄을 맨다. 이는 줄의 동편을 내가 경작한다는 표시이다. 처음에 집사람은 채소 가꾸는 것을 밀레의 그림 “만종”에 비추어 그려보았다고 한다. 차 운전을 못하는 나는 집사람의 도움없이는 밭에 갈 수가 없다. 가기 전에는 나의 부드러운 말이 이어지나 막상 밭에서는 너무 바빠 대화할 틈도 없다. 내가 가꾸는 밭에는, 주위의 밭들과 달리, 항상 들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잡초와의 전투는 장마철이 되면 그 절정에 이른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놀랍다. 나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잡초가 많은 곳에서는 채소가 자라기 어렵고
            채소가 많은 곳에서는 잡초가 자라기 어렵다

또한 채소도 적절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도록 잘 솎아 주어야 하고 밭둑에는 잡초가 뿌리를 굳게 잘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지껏 나는 채소를 솎아 본 적은 없다. 애처로워서. 금년에는 처음 고구마도 심었는데, 용인장에 가서 씨고구마를 달라고 하였더니 웃으시면서 고구마 순을 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 밭에 가면 나는 잡념을 가질 틈이 없어 작년에는 25년만에 안경까지 벗게 된 것 같다. 물론 노화현상이겠지만. 수확물이 넘쳐나서 이집, 저집 배달할 때가 많아 일요일은 매우 바쁘다. 이제 집사람은 농민들로부터 채소를 살 때 가격을 깎지 않는다. 그 노고를 알기 때문에.
  교수임용 비리, 세풍, 옷 로비와 같은 물의가 연이어 빚어지는 가운데 추석대목이 지나자마자, 두 제자로부터 받은 선물 이 야 기를 쓰는 내 마음이 착잡하다. 내가 얼키설키 엮어 세워 놓은 나뭇가지들이 골바람 힘을 못이겨 주저앉아, 이를 감싸면서 탐스러운 열매들을 맺고 있던, 애써 키운 토마토 네 그루가 모두 죽게 된 지난 8월초, 나는 집사람에게 내년부터 밭 경작을 그만 두자고 빗속에서 말하였으나 이 말을 집사람이 따를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고왔던 손이 거칠어지고 변색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왜냐하면 내년 여름에도 그 오래된, 강화도 화문석을 펼치면 채소 밭이 집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릴 테니까.

                                          1999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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