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한국비료와 나
작성자
최창균
작성일
2010-12-20
조회
439
초청의 글
[석등(한국비료공업㈜; 現 삼성정밀화학) 사보 20호, 88-90, 1979]
한국비료와 나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조교수 최창균
(전 울산공장 암모니아과 근무)
1966년 10월 2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삼성입사 필기시험을 보고 2주일 후에 "Typical K-S Mark", "18세의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난생 처음 넥타이를 매고 매형의 양복을 입은 채 면접시험을 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 6개월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저는 지나간 날을 회상하며 한국비료와 관련된 희비애락을 정리하여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966년 11월 7일 입사시험 합격자를 위한 삼성 소개모임이 있어서 푸짐한 점심식사 대접을 받고 그 당시에 서서히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한 유명한 감미료 원료 사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듣느라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당시만 하여도 대부분의 기업체에서는 입사시험 방식을 통하여 사원모집을 하여 우수한 학생도 운이 나쁘면 낙방의 쓴 경험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삼성 맨(삼성 Man)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자랑으로 여기어 이를 크게 노출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를 생각하면 현재 대학졸업생들이 얼마나 여유 있는 편안한 길을 가고 있는지 자못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해가 바뀌어 1967년 1월 12일 삼성빌딩에서 정신훈화겸 수습사원으로서의 역할 및 초보적인 훈련지침을 듣고 다음날 아침에 할머님, 어머님의 따스한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햇병아리처럼 몸을 떨며, 8시발 재건호에 몸을 싣고 대구로 향하였습니다. 대구에 도착즉시 제일모직에 가서 바로 훈련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기상하여 대구 역전에 소재한 여관(roommate 김영웅)에서 제일모직까지 걸어가서 아침식사, 주산연습, 정신훈화, 강의, 견학, 그리고 보고서 작성으로 일관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가정을 떠나 여관, 직장, 다방, 영화관과 술집을 전전하며 보낸 1개월간의 대구 생활은 최초로 사회에 대한 회의, 나아가서 일면의 반감마저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독에 대한 체념 내지 극복을 하고, 하나라도 알고 배워서 알찬 결실을 맺자는 마음가짐과 더욱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환담하고 협동할 수 있는 노력, 즉 사회에 적응하려는 겸허한 마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2월 13일 제일모직을 떠나 기차로 경주를 거쳐 울산에 도착하여 바로 한국비료로 향하였습니다. 도로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황량한 길을 지나 세찬 바람 속에 견학 정도로 건설현장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날이 최초로 제가 한국비료공장에 발을 딛은 날이었습니다. 숨막힐 듯이 질서정연하고 수많은 여공속에서 남 성역할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제일모직에 비하여 활기속에 동양제일의 요소비료 공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는 한국 비료가 일하고 싶은 의욕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을 내심 기약하고 다음날 부산 제일제당으로 향하였습니다.
푸른 파도가 잔잔히 몰려오는 해변가에 이름 모를 해녀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물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인 해안을 지나며 망망한 대해의 힘을 부러워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남행을 하여 곳곳의 풍물에 관심을 보이며 서울과 같이 인파가 몰리는 부산진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제일 제당에서의 일과도 제일모직과 비슷하였으나 훈련기간이 짧아서인지 그다지 지루함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온 이래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연일 술과 싸움을 하여서인지 간혹 객혈까지 할 정도로 몸은 극히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소주를 한잔도 제대로 못 마시던 제가 그래도 반 병을 돌파하게 된 것도 객지에서의 수습사원 생활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월 18일 실습지 변경통보가 있었는데 이름이 누락되어 바라던 한국비료로 갈 수 없게 되는 듯하여 실망 속에 나날을 보내다가 2월 26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명실상부한 학사, 아니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수일간 시장조사라는 명목하에 영등포시가도 누벼보며 삼성빌딩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3월 4일 ROTC 임관, 3월 6일 한국비료사원을 증명하는 사령증 수령, 3월 7일 휴직, 3월 17일 병기학교입교‥‥‥, 3월은 정말 분주하고 변화가 많은 달이었습니다. 원하던 대로 한국비료 사원이 된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굳건한 심적 자세로 군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1969년 6월 30일 소위로서 군복을 벗고 7월 2일 이미 산업은행 관리기업체가 된 한국비료 본사를 방문하여 복직원을 냈습니다. 서울에 상주하는 몇 선배님들을 만나 뵙고 나니 정말 울산현장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얼마나 방황 및 고뇌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군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수석졸업자가 가질 수 있었던 보직 선택권의 상실, 또한 중위로서의 진급기회 상실에 덧붙여 일부 선배들과 다르게 서울에서의 근무 가능성 상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소위 사회풍토병에 만연되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결심을 하고 2주 후 울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김옥야형을 비롯한 입사 동기생들의 따스한 환대를 받은 직후 지갑을 잃어버려 제발 주민등록증만은 돌려주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울산에서의 첫 밤을 지새웠습니다. 암모니아 공장의 현장에 배치되어 현 유경종 공장장님의 지도하에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 1개월은 하늘과 땅만을 보며 공정, 배관, 기기 및 장치파악을 하면서 보낸 후 현장조감독으로 박인섭, 김순기, 강석종, 최창웅 제형의 따스한 격려와 지도 속에 교대근무를 하였습니다. 야근 후 휴일에는 빠짐없이 서울로 올라와 애써 번 돈을 서울 깍쟁이 친구들과 함께 소비하였습니다. 기차 애용가로 철도청장 표창을 받을 만도 한 데, 많지도 않은 수염을 깎지 않은 덕분에 부산역전에서 경찰서에 간첩(?) 혐의로 붙잡혀 간 적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근무하면서 서먹서먹 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다정하여지는 근무동료들과 함께 낚시, 소풍도 가고 저녁 근무시간이 끝난 후에는 다같이 시내에 내려 사택까지 걸어가면서 자정이 넘도록 이 술집, 저 술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 두잔 마시며 환담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울산공대학장님께서 작업복 입은 저를 보시고 같이 온 제 친구에게 제가 대학 출신이냐고 문의하셨다고 하여 웃던 일도 생각납니다. 또한 모 음식점 주인이 어느 동료와 함께 가면 불고기 1인분을 시켜도 푸짐하게 주고는 하였습니다. 주인 양반께서 따님 생각을 하신 까닭이었습니다. 때문에 꼭 이 친구와 그 음식점에 가서 엄숙하게 실컷 먹고, 나오며 깔깔대던 추억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대학동창들도 울산에 많아 서로 웃고 떠들며 짓궂은 장난도 심심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울산에 내려와서 현장근무를 하면서, Reformer에 새벽녘에 불이 나서 굳은 마음으로 뛰어 올라가던 때,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날 밤 Preheater에 이상이 있어서 달려 가다가 시궁창에 빠져 울상을 짓던 때의 기억도 나는군요. 처음에는 그렇게도 울산에 오기 싫었는데 근무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또한 정도 들어서 공학도면 누구에게나 꼭 겪어볼 만한 일로 권장할 정도로 심적 변화가 생겼습니다. 학교에서 말과 그림으로만 듣고 보던 장치들을 실제로 보고 알 수 있는 바로 "百聞不如一見"의 좋은 기회가 현장근무라고 믿습니다.
학구에 몰두하고 싶은 유년시절부터의 소망 때문에 1970년 7월 27일부로 사직원을 내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며칠만 더 근무를 하면 8월분 월급을 탈 수 있었으나 심적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在美과학자의 엉뚱한 과대망상증에 바보처럼 휘말려들어 공연히 방황하다가 인연을 끊고, 다음해에 뜻한바 대로 독자적으로 장학금을 받아 8월 23일, 공교롭게도 추자도(?; 최근 영화를 통하여 실미도로 확인) 사건이 있던 날에 유학의 길에 올랐습니다. 미국이라는 넓은 땅덩어리를 배회하다가 1976년 3월 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연구원으로 귀국하여 다시 한국비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도미 전 독신주의 회장(?)을 자처하던 제가 독신생활을 청산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비료에서의 짧은 공장생활이 제 인생여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한 것 같습니다.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자신이 올바른 제 좌표를 찾았는가에 대하여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피안을 향한 과정은 자신의 능력 미래를 알지 못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타인의 그리고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잡다한 수많은 길들로 구성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시 희망을 앞세우고 자신의 현 책무에 열중하여 자아발견에 몰두할 수 있을 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제 소신은 바로 한국비료에서의 현장근무경험이 기초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석등(한국비료공업㈜; 現 삼성정밀화학) 사보 20호, 88-90, 1979]
한국비료와 나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조교수 최창균
(전 울산공장 암모니아과 근무)
1966년 10월 2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삼성입사 필기시험을 보고 2주일 후에 "Typical K-S Mark", "18세의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난생 처음 넥타이를 매고 매형의 양복을 입은 채 면접시험을 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 6개월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 저는 지나간 날을 회상하며 한국비료와 관련된 희비애락을 정리하여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966년 11월 7일 입사시험 합격자를 위한 삼성 소개모임이 있어서 푸짐한 점심식사 대접을 받고 그 당시에 서서히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한 유명한 감미료 원료 사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듣느라고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당시만 하여도 대부분의 기업체에서는 입사시험 방식을 통하여 사원모집을 하여 우수한 학생도 운이 나쁘면 낙방의 쓴 경험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삼성 맨(삼성 Man)이 된 것을 기뻐하고 자랑으로 여기어 이를 크게 노출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당시를 생각하면 현재 대학졸업생들이 얼마나 여유 있는 편안한 길을 가고 있는지 자못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해가 바뀌어 1967년 1월 12일 삼성빌딩에서 정신훈화겸 수습사원으로서의 역할 및 초보적인 훈련지침을 듣고 다음날 아침에 할머님, 어머님의 따스한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햇병아리처럼 몸을 떨며, 8시발 재건호에 몸을 싣고 대구로 향하였습니다. 대구에 도착즉시 제일모직에 가서 바로 훈련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기상하여 대구 역전에 소재한 여관(roommate 김영웅)에서 제일모직까지 걸어가서 아침식사, 주산연습, 정신훈화, 강의, 견학, 그리고 보고서 작성으로 일관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가정을 떠나 여관, 직장, 다방, 영화관과 술집을 전전하며 보낸 1개월간의 대구 생활은 최초로 사회에 대한 회의, 나아가서 일면의 반감마저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독에 대한 체념 내지 극복을 하고, 하나라도 알고 배워서 알찬 결실을 맺자는 마음가짐과 더욱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환담하고 협동할 수 있는 노력, 즉 사회에 적응하려는 겸허한 마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2월 13일 제일모직을 떠나 기차로 경주를 거쳐 울산에 도착하여 바로 한국비료로 향하였습니다. 도로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황량한 길을 지나 세찬 바람 속에 견학 정도로 건설현장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날이 최초로 제가 한국비료공장에 발을 딛은 날이었습니다. 숨막힐 듯이 질서정연하고 수많은 여공속에서 남 성역할을 잃어가고 있는 듯한 제일모직에 비하여 활기속에 동양제일의 요소비료 공장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고 있는 한국 비료가 일하고 싶은 의욕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을 내심 기약하고 다음날 부산 제일제당으로 향하였습니다.
푸른 파도가 잔잔히 몰려오는 해변가에 이름 모를 해녀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물속을 들락날락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인 해안을 지나며 망망한 대해의 힘을 부러워하였습니다. 난생 처음 남행을 하여 곳곳의 풍물에 관심을 보이며 서울과 같이 인파가 몰리는 부산진역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제일 제당에서의 일과도 제일모직과 비슷하였으나 훈련기간이 짧아서인지 그다지 지루함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나온 이래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연일 술과 싸움을 하여서인지 간혹 객혈까지 할 정도로 몸은 극히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소주를 한잔도 제대로 못 마시던 제가 그래도 반 병을 돌파하게 된 것도 객지에서의 수습사원 생활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월 18일 실습지 변경통보가 있었는데 이름이 누락되어 바라던 한국비료로 갈 수 없게 되는 듯하여 실망 속에 나날을 보내다가 2월 26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여 명실상부한 학사, 아니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수일간 시장조사라는 명목하에 영등포시가도 누벼보며 삼성빌딩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3월 4일 ROTC 임관, 3월 6일 한국비료사원을 증명하는 사령증 수령, 3월 7일 휴직, 3월 17일 병기학교입교‥‥‥, 3월은 정말 분주하고 변화가 많은 달이었습니다. 원하던 대로 한국비료 사원이 된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굳건한 심적 자세로 군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1969년 6월 30일 소위로서 군복을 벗고 7월 2일 이미 산업은행 관리기업체가 된 한국비료 본사를 방문하여 복직원을 냈습니다. 서울에 상주하는 몇 선배님들을 만나 뵙고 나니 정말 울산현장으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얼마나 방황 및 고뇌를 겪었는지 모릅니다. 군에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수석졸업자가 가질 수 있었던 보직 선택권의 상실, 또한 중위로서의 진급기회 상실에 덧붙여 일부 선배들과 다르게 서울에서의 근무 가능성 상실이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소위 사회풍토병에 만연되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결심을 하고 2주 후 울산으로 향하였습니다. 김옥야형을 비롯한 입사 동기생들의 따스한 환대를 받은 직후 지갑을 잃어버려 제발 주민등록증만은 돌려주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울산에서의 첫 밤을 지새웠습니다. 암모니아 공장의 현장에 배치되어 현 유경종 공장장님의 지도하에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첫 1개월은 하늘과 땅만을 보며 공정, 배관, 기기 및 장치파악을 하면서 보낸 후 현장조감독으로 박인섭, 김순기, 강석종, 최창웅 제형의 따스한 격려와 지도 속에 교대근무를 하였습니다. 야근 후 휴일에는 빠짐없이 서울로 올라와 애써 번 돈을 서울 깍쟁이 친구들과 함께 소비하였습니다. 기차 애용가로 철도청장 표창을 받을 만도 한 데, 많지도 않은 수염을 깎지 않은 덕분에 부산역전에서 경찰서에 간첩(?) 혐의로 붙잡혀 간 적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근무하면서 서먹서먹 하였지만 날이 갈수록 다정하여지는 근무동료들과 함께 낚시, 소풍도 가고 저녁 근무시간이 끝난 후에는 다같이 시내에 내려 사택까지 걸어가면서 자정이 넘도록 이 술집, 저 술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 두잔 마시며 환담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울산공대학장님께서 작업복 입은 저를 보시고 같이 온 제 친구에게 제가 대학 출신이냐고 문의하셨다고 하여 웃던 일도 생각납니다. 또한 모 음식점 주인이 어느 동료와 함께 가면 불고기 1인분을 시켜도 푸짐하게 주고는 하였습니다. 주인 양반께서 따님 생각을 하신 까닭이었습니다. 때문에 꼭 이 친구와 그 음식점에 가서 엄숙하게 실컷 먹고, 나오며 깔깔대던 추억들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는 대학동창들도 울산에 많아 서로 웃고 떠들며 짓궂은 장난도 심심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울산에 내려와서 현장근무를 하면서, Reformer에 새벽녘에 불이 나서 굳은 마음으로 뛰어 올라가던 때,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어느 날 밤 Preheater에 이상이 있어서 달려 가다가 시궁창에 빠져 울상을 짓던 때의 기억도 나는군요. 처음에는 그렇게도 울산에 오기 싫었는데 근무하면서 배운 것도 많고, 또한 정도 들어서 공학도면 누구에게나 꼭 겪어볼 만한 일로 권장할 정도로 심적 변화가 생겼습니다. 학교에서 말과 그림으로만 듣고 보던 장치들을 실제로 보고 알 수 있는 바로 "百聞不如一見"의 좋은 기회가 현장근무라고 믿습니다.
학구에 몰두하고 싶은 유년시절부터의 소망 때문에 1970년 7월 27일부로 사직원을 내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며칠만 더 근무를 하면 8월분 월급을 탈 수 있었으나 심적 부담을 가중시킬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在美과학자의 엉뚱한 과대망상증에 바보처럼 휘말려들어 공연히 방황하다가 인연을 끊고, 다음해에 뜻한바 대로 독자적으로 장학금을 받아 8월 23일, 공교롭게도 추자도(?; 최근 영화를 통하여 실미도로 확인) 사건이 있던 날에 유학의 길에 올랐습니다. 미국이라는 넓은 땅덩어리를 배회하다가 1976년 3월 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연구원으로 귀국하여 다시 한국비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도미 전 독신주의 회장(?)을 자처하던 제가 독신생활을 청산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비료에서의 짧은 공장생활이 제 인생여정의 기틀을 마련하게 한 것 같습니다.
모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 제 자신이 올바른 제 좌표를 찾았는가에 대하여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피안을 향한 과정은 자신의 능력 미래를 알지 못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타인의 그리고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잡다한 수많은 길들로 구성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항시 희망을 앞세우고 자신의 현 책무에 열중하여 자아발견에 몰두할 수 있을 때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제 소신은 바로 한국비료에서의 현장근무경험이 기초를 이루게 한 것입니다. 끝으로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의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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