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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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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UN군 사령부:
대한민국 590,911명
미국 480,000명
오스트레일리아 8407명
캐나다 2만 5687명
뉴질랜드 3794명
영국 5만 6000명
필리핀 7420명
터키 1만 4936명
네덜란드 3522명
룩셈부르크 44명
콜롬비아 1,068명
벨기에 900명
에티오피아 1,271명
프랑스 1,119명
그리스 1,263명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타이 1,294명
총: 933,845명
공산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260,000명
중화인민공화국(중국) 780,000명
소비에트 연방(소련) 26,000명
총: 1,066,000명
의료지원국
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스라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인민 공화국
헝가리 인민 공화국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피해 규모
군인
14만 9005명 전사
71만 783명 부상
13만 2256명 실종
민간인
37만 3599명 사망
22만 9625명 부상
30만 3212명 행방불명
총계
52만 2604명 사망
94만 408명 부상
43만 5468명 실종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한국 전쟁(韓國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정전 중이지만, 정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개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해 왔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적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다. 이 때 서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7월 14일에는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 주었다.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했다. 1950년 9월 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펼치고 같은 해 9월 28일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을 함락하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듯했는데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에는 휴전선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 존속되고 있다.
다양한 호칭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정부의 호칭)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 그 밖에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초기부터 80년대까지는 6.25사변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80년대 민주화투쟁시국의 진보적 지식계층에서 외국(특히 미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타국의 사건을 다루듯 직역해서 "한국 전쟁"으로 번역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 출판계에서까지 따라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이라는 호칭은 이 전쟁이 마치 제3의 국가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 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일본), 항미원조전쟁(중국어 정체: 抗美援朝戰爭, 중화인민공화국), 한국 전쟁(Korean War) 등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