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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작성자
최창균
작성일
2011-07-01
조회
698


[실학산책] 제 245 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홍종우(洪鍾宇, 1850~1913)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홍재원(洪在源)의 외아들로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고금도에서 보낸 그는 1886년 모친이 사망하자 서양의 근대법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생각이었다.

홍종우는 1888년 도쿄에 도착한 이후 2년 동안 일본에서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조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국제 정세의 변화를 살폈다. 그는 프랑스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서화를 그려 팔거나 조선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에 나섰고, 오사카의 아사히신문사에서 촉탁 식자공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홍종우는 일본의 자유당 당수를 지낸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와 교류했는데, 프랑스로 갈 때 그는 클레망소 대통령에게 추천장을 써주었다.

 

파리 사교클럽에 나가고, 우리 책 번역활동도 

홍종우는 1890년 12월 24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40여 일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그는 소르본 대학 근처에 있는 세르빵드(Serpente) 거리에 숙소를 정하고, 파리의 저명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만나며 친분을 맺었다. 1891년에 그는 파리의 사교 클럽인 ‘여행가 모임’에서 연설을 했다. 조선은 지리적 환경 때문에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유럽의 문물을 수입하여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 급선무라는 내용이었다.

홍종우는 기메 박물관(Musée Guimet)의 연구 보조자로 채용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친구이자 기록화가인 펠릭스 레가미(Félix Régamey)가 그를 박물관의 설립자인 기메(Émile Guimet)에게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홍종우는 기메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고전과 점성술 책, 일본과 중국의 문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당시 파리에는 동양어학교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어학과 문화에 대한 연구가 성행했고, 홍종우의 번역 활동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한 것이었다.

1892년에 간행된 『향기로운 봄』은 『춘향전』을 번역한 것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었다. 번역자는 로니(J.H.Rosny)였고, 홍종우는 그에게 한국의 풍속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 무렵 홍종우는 건장한 체구에 큰 키의 몽골인으로 통이 넓은 나팔 모양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1895년에 나온 『다시 꽃이 핀 마른나무』는 홍종우가 『심청전』을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홍종우는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는 한국사를 다섯 단계로 구분했으며, 기자 조선은 코리아의 진정한 역사 시대이고, 고구려는 ‘코리아’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나라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유럽과의 접촉이 늦어진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1897년에 나온 『개인의 수호성을 순조로이 이끌고 한 해 운세를 알기 위한 지침서』는 『직성행년편람』이란 점성술 책을, 1898년에 간행된 『화성 성곽 완공 의례집』은 『화성성역의궤』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번역에는 앙리 슈발리에(Henri Chevalier)가 참여했는데, 그는 프랑스 민속박물관의 관장이었다. 이들 번역서는 점성술이 유행하던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고, 파리의 도시 건축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항상 한복을 입고, 고종 사진을 몸에 지녀

홍종우는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항상 한복을 입었고, 고종의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유럽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했지만, 조선의 전통과 국왕의 권위를 매우 중시하는 입장이었다. 1893년에 귀국 길에 오른 그가 김옥균을 상하이로 유인하여 살해한 것도 근대화를 이루는 방법에 견해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그의 활동 목표는 국왕을 구심점으로 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홍종우는 1894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문과에 급제했고, 대한제국 정부의 승지를 역임했다. 그는 고종 황제가 추진한 근대화 정책에 적극 가담했지만, 1905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관직에서 밀려났다. 식민지 초기에 그는 실의 속에 쓸쓸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했던 홍종우의 묘소는 현재 서울 만리동 봉학산의 공동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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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문식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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