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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윤창구 박사님을 회고하면서

작성자
최창균
작성일
2011-07-24
조회
972


故 윤창구 박사님을 회고하면서

 

 

오늘 윤창구 박사님의 서거 20주기에 즈음하여, KIST 화학공정연구실 전현직 연구원 29명이 모여 윤 박사님 묘소에 가기로 하였다. 오늘따라 특히 윤 박사님 생각이 많이 나서 여기에 단편적인, 윤 박사님 회고의 글을 조심스럽게 쓴다.

 

1976년 3월1일에 나는 4년반동안 그리워하던 조국으로 미련없이 돌아왔다. KIST(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은사이신, 화학공정연구실장 박원희 박사님(서울대 화학공학과 교수, KIST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 역임)의 지도하에 연구실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부터 존칭은 약하겠다. 이 점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때 윤창구 박사를 처음 만났다. 윤 박사는 화학공정연구실에서 독립하여 연료연구실 실장으로 있었다. 윤 박사는 항상 웃는, 천진난만한 열혈청년으로 나에게 보였다.

 

나는 연구실은 달랐지만 윤 박사와  "해수로부터 우라늄 회수에 관한 연구"(IAEA 지원)를 함께 하였다. 물론 나는 인 화합물(동양화학 지원), 펜타에리스리톨(동명목재 지원) 관련의 화학공정연구실 연구프로젝트에도 참여하였다. 화학공정연구실, 연료연구실, 박원훈 박사(KIST 원장 역임)의 고온공정연구실, 세 연구실은 뿌리가 같아 한 연구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침에 박원희, 박원훈, 윤창구, 나, 넷이 모여 그 날의 일과를 논의할 때가 많았다.

 

해수 우라늄 회수와 인산 정제 연구를 하다가 비료용 인산에 미량의 우라늄이 있음을 알게 된 윤 박사와 나는 오창호 박사(재미)와 함께 "인산 우라늄 회수"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당시 복합비료를 생산하고 있었던 영남화학에는 내 친구인 정구동 사장이 공정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는 비료용 인산으로부터 회수한 우라늄을 가지고 영남화학 김성룡 사장(공군참모총장 역임)을 만나 관련 연구 지원을 약속 받았다. 연구 결과를 가지고, KIST 권영수 박사(당시 설계 관련 부서 실장)와 함께, 영남화학 울산공장에 설치할 시간당 1파운드의 "Yellow Cake"[우라늄 화합물]를 생산할 파일럿 플랜트를 설계하고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국산화에 심취하여 있었으나 뜻만 같지 않았다. 예를 들어, 플랜트에 처음에 설치된 펌프들이 전부 인산에 부식되어 일제로 교체하였다. 당시 영남화학 최성용 공장장(상무로 작고)도 많은 곤경을 겪었다.

 

이러한 와중에 나는 떠나기 싫었던 KIST를 1978년 2월말로 떠나 서울대 화학공학과 조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대의 양해하에 일주일에 이틀은 KIST에서 1981년 7월까지 위촉연구원으로 일하였다. 영남화학 인산우라늄 파일럿 플랜트 준공식에는 내가 비록 서울대에 있었지만 KIST 대표로 참석하여 최성용 공장장과 함께 돼지머리 앞에서 고사를 지냈다. 그 후 나는 가족과 함께 1년간 미국에 있었다.

 

1982년 9월에 귀국하였더니 100만달러 이상 투자되었던 영남화학 파일럿 플랜트는 폐기상태에 있었다. 제품 구매처가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들었다. 윤 박사는 매우 실망하였으리라. 몇년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우라늄 오용사건이 있었다. 사용된 우라늄이 바로 영남화학 제품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실 생산된 영남화학 제품은 대부분 실제 핵연료봉이 되어 우리나라 전기로 사용되었다. 내가 들은 소리를 종합하면, 나는 인산 우라늄 프로젝트 자체, 이에 따른 막대한 투자비도 불협화음으로 없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강한 기술인력은 양성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윤 박사와 만날 기회가 많았다. 1983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해수 우라늄 회수"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내가 윤 박사 대신 KIST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1991년 7월27일 윤 박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나는 너무 놀랐다. 재사단명인가. 최성용 공장장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느 분이 우라늄 방사능 때문인가 하고 나에게 물어 나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내 생각에는 심한 스트레스의 후유증이다. 성공적인 인산우라늄 파일럿 플랜트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동안 영남화학, 동양화학은 개명되었고 동명목재는 없어졌다. 여러 면으로 감회가 깊다..

 

이 기회에 윤 박사님, 겸하여 최성용 상무님의 명복을 다시 기원합니다.

 

 

[註] 위에 나오는 분들 중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생: 박원희( 9회), 최성용(13회), 박원훈(16회), 윤창구(17회), 정구동(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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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참고로 윤 박사님에 대한 두 글을 아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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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싶은 화학공학자 윤창구

한국화학공학회지 'NICE' 에 '기억하고싶은 화학공학자 윤창구'라는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글쓴이는 윤주영 박사입니다.

윤창구 박사에 관한 전반적인 얘기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클릭하시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yunposun.com/technote/board/notice/upfile/Yunck_chemical.pdf

http://www.yunposun.com/tech7/board.php?board=notice&page=11&command=body&no=167

http://www.cheric.org/PDF/NICE/NI24/NI24-6-06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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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창구(1941년 12월 18일 ~ 1991년)는 대한민국의 화학자이다. 윤택선과 이기화의 7남매 중 다섯째 아들로, 전 대한민국 대통령 윤보선, 화가 윤시선, 공무원 윤원선의 조카이다. 본관은 해평.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미네소타대 화학공학과로 유학을 갔다. 대학 졸업후 당시 석유공사라는 안정된 직장에 취직이 보장되어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유학기회가 생기자 큰 뜻을 품고 미국행 배를 타게된 것이다.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유학후 1973년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부임하여 KIST화학공학부 부장까지 지냈다.

 

미네소타대에서 수학 중 미국 하니웰 우주항공사 연구원으로 2년간 일하기도 하였고 화학공학 박사를 받은 후 미국 미시간대, 존스홉킨스대, 영국 스트랏클라이드대 등에서 연구한 후 KIST 화학공정연구실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최창균 註] 위의 글은 보완되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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