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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칠석날: 견우(牽牛)의 노래

작성자
최창균
작성일
2011-08-07
조회
522


견우(牽牛)의 노래/서정주
시집<귀촉도>(1946)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하(銀河)ㅅ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織女)여, 여기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七月) 칠석(七夕)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織女)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解說: 詩人 김원호 >


동서양을 물론하고 설화나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사랑’의 제재는 아름답고 순수하지만 미완성이거나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그만큼 독자에게 안타까움과 감동을 주고 커다란 여운을 남기게 마련이다.

 

이 작품은 서로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안타까운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별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종말이지만,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이별을 사랑을 위한 내적 성숙의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성취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자립할 때만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이 시는 한(恨)의 체념과 패배주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쳐 드높은 세계로 고양(高揚)하여 사랑을 성취하겠다는 정신주의의 경지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한편 이 시의 제2,3연에 나타난 차가운 물의 이미지가 제4연에 와서 뜨거운 불의 이미지로 바뀌어 쓸쓸하고 그리움에 젖은 심정이 사랑의 간절함으로 점점 열기(熱氣)를 더해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서양의 설화에도 견우성에 해당하는 목동의 별 ‘베가(Vega)’와 직녀성에 해당하는 ‘알타이르(Altair)’가 일년에 한 번 만난다는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시 <견우의 노래>는 이별을 단순한 아픔으로 보지 않고 역설적으로 참된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성숙한 자세와 계기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우리들의 사랑을 ~ 이별이 있어야 하네”에서 만 남과 사랑을 이루기 위한 조 건으로 이별의 상황을 설정한 것은 역설적 구조이다. 이별의 고통을 인내하고 기나긴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칠 때, 참된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높았다 낮았다 ~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에서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은 두 사람을 이별의 고통 속에 갈라놓는 장애물이 된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애타게 상대방을 그리워하게 된다. 따라서 연인에게 고통이란 사랑의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필수 요건이고, 사랑의 본질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오! 우리들의 ~ 은하ㅅ물이 있어야 하네”에서 독수리자리 으뜸별인 ‘견우성’과 거문고자리 ‘직녀성’ 사이에는 은하수가 걸쳐 있다. ‘은하(銀河)ㅅ물’은 견우와 직녀를 갈라놓는 단절의 존재이면서, 두 사람의 사랑의 심정을 더욱 북돋우는 상징이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단절의 상태에 놓여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단절의 상태를 뛰어넘어 사랑으로 합일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는 장애물로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결연한 심정을 표명하고 있다.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는 고독 속에 직녀를 그리워하는 견우의 사랑의 불길과, 직녀와 만날 때까지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디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의 제2,3연에 나타난 차가운 물의 이미지가 이 구절에서 뜨거운 불의 이미지로 바뀌어 견우가 홀로 떨어져 있어도 사랑의 열기(熱氣)만은 점점 뜨거워져 감을 암시하고 있다.

 

“직녀여, 여기 번쩍이는 ~ 풀싹을 나는 세이고”에서 ‘번쩍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은 견우 앞에 놓인 고난을 상징한다. ‘돋아나는 풀싹을 세이고’는 직업이 소 치는 목동인 견우가 직녀와 만날 준비를 하는 작업이다. “허이연 ~ 베틀에 북을 놀리게”에서 직녀는 하늘나라 임금의 딸로, 베를 튼튼히 잘 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 부녀자들이 칠월 칠석날 밤에 바느질과 길쌈을 잘하게 해 달라고 직녀에게 비는 ‘걸교(乞巧)’라는 풍습이 있었다. 설화에 의하면 견우와 직녀 두 사람이 결혼 후 자기의 직분을 망각하고 노는 데만 빠졌기 때문에 노한 임금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견우가 직녀에게 자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준비임을 설득하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북’은 ‘방추(紡錘)’라고도 하는데, 베틀의 씨올의 실꾸리를 넣는 제구로 날 틈으로 오가며 씨를 푸는 구실을 한다. ‘구름’은 직녀에게 놓인 시련의 공간을 의미한다. “눈썹 같은 반달이 ~ 돌아오기까지는”에서 일년 동안 헤어졌던 견우와 직녀는 드디어 음력 칠월 칠석에 만나게 된다.

 

그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성숙하게 되고, 그 사이의 이별이 고통과 아픔이 아니라 간절한 사랑으로 성장하는 바탕이 된다. ‘눈썹 같은 반달’은 시간적으로 음력 칠월 칠석임을 나타내며, 두 사람의 만 남이 아름답고 황홀한 재회가 될 것을 암시한다. “검은 암소를 나는 먹이고 / 직녀(織女)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에서 제7,8연은 제5,6연의 반복으로, 견우는 직녀에게 두 사람이 다시 만날 때까지 각자 자기 직분과 생활에 충실하자는 부탁을 한다.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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