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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규 교장선생님과 나의 중학시절 회상 小考
-김원규 교장선생님(서울중/고 교장 1946-1957 역임후 경기중고 교장으로 부임; 흉상이 서울고 교정에
있음) 30주기 추모 문집 "초청의 글"로 쓴 글-
아래의 글 중 [ ] 속의 내용은 현직 또는 개명과 같은 변화 사항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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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규
교장선생님과 나의 중학시절 회상 小考
최창균(京畿中 9회/서울대 응용화학부 교수)
1998년 10월 15일
靑雲之志를 지니셨던 김원규
교장선생님께서 타계하신 지 30년이 된다니……. 세월의 지나감이 매우 빠름을 또다시 절감하게 한다. 우선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
선생님께서는,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경기중학교가 17회 졸업생들을 배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막을 내린, 1968년에 운명을 달리 하셨다.
내가 처음 교장선생님을 뵌 것은, 1957년 4월 1일 선생님의 경기중고등학교 교장 취임에 이은, 경기중학교 입학식에서였다. 나의 입학을 알게
된 것은 전 달 3월 12일이었다. 내 수험번호 516번이 420명의 신입생 명단 중에 적혀 있는 것을, 花洞언덕에 있는 우리나라
中等敎育發祥之地에서 보고 그처럼 기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선생님과 나는 난생 처음 京畿人(이 글에서는 경기고 동창회원, 경기중고의
전․현직 교직원과 재학생에 속하는 사람을 총칭함)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상억 군[서울대 국문과 교수]과 나는, 동점으로, 7등으로
입학하였고 둘 중 내가 키가 조금 더 크다고 1학년 7반 담임선생님(심기섭)은 나를 반장으로 정하셨다. 부반장이 된 이 군의 부모님께서는
점잖으셔서 선생님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도리라 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인가 교장선생님께서는 교무실에서 나를 보시고 다정하게 내 이름을
물으셨다. 내 이름을 말씀드리니 교감선생님(張昌均, 1957년 12월까지 재임)과 성만 다르지 이름이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이것이 첫 대화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당시에 중학교 과목은 국어과(강독, 문법, 작문, 한문의 4과목), 수학과(대수, 기하의
2과목), 사회생활과(공민, 지리, 역사의 3과목), 과학과(물상, 생물의 2과목), 체육, 음악, 미술, 상업, 외국어과(영독, 영작의
2과목), 도합 17개 과목이었고 그 개설은 부분적으로는 교장 재량에 달린 것으로 생각된다. 강독은 국어로 통칭되었다.그러나 학년별로 누구나
동일한 과목들을 공부하여야만 하는, 학생의 자율적인 선택권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각 과목은 100점 만점이었고 거의 매월 월정고사가
실시되었다. 시험과목은 영․수․국 위주이었지만 매번 다소 달랐다. 서울창경국민학교(서울대 치과대학 자리에 있었음)에서 혼자 입학한 나는 제1회
월정고사(강독/대수/기하)에서 사촌형인 최중균 군[신창기연 사장]과 동점 수석을 하였다. 이때 아마도 조회시간에 연단 위에서 교장선생님과 처음
악수를 하였으리라. 이를 계기로 나는 정경진 선생님[종로학원 원장]으로부터 사랑을 담뿍 받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 모르게 여러 번 등록금을
대납하여 주셨고 영화관에 나를 데리고 가기도 하셨다. 나는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고 있으나, 아마도 내가 세 살이 되기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고,
한때 은행원, 교육자이면서 지주이셨던, 우리집의 절대적인 가장이신 할아버지께서 나를 부양하고 있으심을 선생님이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 같다. 이
당시에 최중균 군을 포함하여 우리집에는 9명이 학교를 다녔다. 가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귀여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와 관련하여
커서 왜 나를 도와주셨느냐고 투정 어린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선생님은 내가 육군 소위(ROTC 5기), 한국비료공업(주)[삼성정밀화학(주)]
사원 근무를 거쳐 1971년 도미 유학할 때도 많은 돈을 주셨다. 선생님은 바로 김 교장선생님께 유능한 교사로 알려져서 특채되었다고 들었으나
확인은 하지 않았다. 나는 정 선생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 당시에 교원은 교사, 전임강사, 시간강사로, 직원은
사무관, 주사, 서기, 촉탁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양호, 도서는 특수요원이 담당하였다. 君子三樂 중, 우리들 때문에, 세 번째 즐거움을 만끽하기
시작하신 교장선생님께서는 부임하신 지 7개월도 지나지 않은 1957년 10월 25일 교장직을 사임하시고 서울사범학교[서울교육대학] 교장으로
전근하시게 되었다. 이는 주옥같은 천하 영재들 중에도 순간적으로 주먹같은 학생들로 돌변한 경기고 학생들이 있어서 청천벽력 같은 폭력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교장으로 자애로우신 이종림 선생님께서 새로이 부임하셔서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中1 7반 61명 중 1등으로 中2 6반으로
진입한 나는 체육이 63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김원규 교장선생님이 안 계셔서인지, 반장 선거에서 金東五 군[외국 거주]에게 1표 차이로 져서
부반장이 되었다. 사실 이 당시에 키도 작았고(中1 21번, 中2 23번, 中3 23번; 갑자기 커져서 高1 38번, 高2 39번, 高3
43번, 반장이었음), 목소리도 작아서 조회시간에 구령을 맨 앞에서 부르면 친구들의 동작이 슬로모션의 영화장면과 같았다. 여하튼 반장 낙선 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나를 진심으로 위로하여 주셨던 담임선생님(신현익)의 따스한 모습이 간간이 눈에 어린다. 덕분에 지난해 中1 7반을
담당하셨던 체육선생님과 같이 지휘통솔력 부족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간혹 반장을 때려주셨던 선생님들의 매는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958년 4월 22일 김원규 선생님께서 교장으로 재취임하시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따라서 더욱 열심히 “생활향상록”에 매일 실천사항을 쓰고
주간반성록을 기재한 후, 매주 1회 담임선생님의 확인을 받았다. 겨울방학에는 일기까지 썼다. 中2 학기 중에는 이상하게 작문 과목이 개설되어
있지 않았다.
매를 맞지 않아서인지, 나는 中2 447명 중 2등으로 中3 2반으로 진입, 다시 반장이 되었고 담임선생님으로 두
분(고갑주, 최승조)을 연이어 모시면서 중학생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다. 나는 京畿中學校 9回 졸업생 431명 중 2등으로, 3개년 우등상,
개근상을 받았으므로, 연단에 올라 교장선생님과 중학생으로의 마지막 악수를 한 후 졸업하였다.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에, 학교 배지 옆에 나란히
꽂혀 있던 “횃불”형 반장 배지는 2년전 1학년 때 우리반을 담당하신 체육선생님이 교복과 내 목 사이에 손을 넣어 직접 빼어 가셨다. 이 날은
1960년 3월 3일로 내 할아버지께서 타계하신 3일 후이어서 우리집 5남 1녀 중 하나 뿐인 누나(이 당시 서울대 사학과 3학년)만이
가족대표로 졸업식에 왔다. 설상가상으로 하나 뿐인 내 동생이 경기중학교 입학 시험에 두 번째로 실패하여, 그 후유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교정으로 나왔을 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가 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진 1장 찍지 못하고 황급히 교문을 나섰다. 1등
졸업생은 원정일 군[광주 고검장]이었는데, 그의 中3 작문 점수가 내 점수(78점)보다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반을 해본 적이 없는 원
군과 나는 고교 진학 직후부터 절친하게 지냈으며, 작문 점수가 암시한 대로 나는 화학공학과에서, 원 군은 법학과에서 대학생활을 하였다. 중학졸업
시 우등상의 부상으로 “한국사 사전(백낙준 편저, 동아출판사, 4292년 5월, 2000환)”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누나의 영향을 받아온
나는 역사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우리반 부반장으로 나보다 키가 컸던 우등졸업생 김용덕 군[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로 서울대 출판부장 겸임]은
나보다 역사를 더욱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졸업 후 나는 수험번호 85번을 달고 경기고 입시를 긴박감 없이 본 후, 내가 중학교 입시를 보았을
때 겪었던 극심한 긴장과 경쟁 끝에 합격한 타교 출신의 60명을 포함한 479명의 친구들과 高1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소위 4.19
세대에 간신히 합류한 지 10여일이 지난 1960년 5월 5일 교장선생님께서는 갑자기 경기중고를 떠나셨고 그후 나는 선생님을 뵙지
못하였다.
나의 중학생활은 바로 김원규 교장선생님께서 京畿 中興을 도모하신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외람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앞에 약술된 바와 같이 성장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상황을 가급적 내 중학시절(1957. 4 - 1960. 3)에 국한하여, 교장선생님과 우리,
즉 경기 59회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보겠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교장선생님께서는 유능한 교사의 발탁, 수업의
평가 내지 독려에 무엇보다 힘을 기울여 영일이 없으셨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경진 선생님의 경우, 中1에서 명강의를 하셔서 中1에서
高3 수학을 담당하는 선생으로 특진하는 명예를 얻으셨다. 반면, 수업시간에 교장선생님의 암행어사식 교실로의 잠입이 알려져서 망을 보는 학생을
요소에 배치시켜 교장선생님의 예봉을 피한 선생님도 있었다. 사전 경보가 없는 한, 학생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수익 군[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은 책상에 올려놓은 두 손 위에 머리를 얹고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있을 즈음 교실 뒷문으로 들어오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의 손 매를
등에 맞고 놀랐다고 한다. 여전히 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글쎄……. 이 당시 선생님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음은 선생님들 중 대학
교수, 유명한 학원 원장이 되신 분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1815년 6월 18일에 프랑스의
Napoleon 황제를 패배시킨 영국의 Wellington 장군을 배출시킨 Eton 스쿨(Eton College)에 버금가는 전통을 가질 京畿를
만들고 싶어 하셨다. 선생님의 뜻을 헤아리도록 장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겠다.
" The battle of Waterloo was
won on the playing-fields of Eton."
이 학교에는 15세기에 사용했던 교실이 아직도 있고 회의실에는 그
동안 배출된 수많은 인재들의 흉상이 즐비하며 재학생은 현재 1200명 정도인데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 스포츠, 미술, 음악, 연극공연을
중시하는데도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고 대학 진입생의 40%이상이 명문대학들인 Oxbridge에서 학문연마를 시작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명문
중․고등학교 이야기를 통하여 조국애와 모교애를 강조하셨고 京畿人의 개인주의와 단결력 부족으로부터의 탈피는, 우리가 부르는 교가(이병기 작사,
나운영 작곡)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하셨다. 관련된 말씀의 핵심은 교가의 2, 3절 구절들을 접합시킨 다음의 글이다.
부지런
부지런히 배우고 배워
지덕을 밝히고 품격을 높여
알고는 아는 대로 실행을 하여
무거운 짐을 저도 가벼워
하며
내 나라 나랏집의 동량이 되세
이에 부가하여 우리의 정신적 지주가 된 것은 “中”자가 보이는 교기, 또한 조삼현
군[일우기술 대표이사]의 부친으로 우리의 중학입시를 주관하신 조재호 교장선생님께서 花洞心法에 명시하신 교훈(씩씩하자; 참되자; 사랑하자)이었다.
京畿人 중, 사오정은 괜찮지만, 속칭 톡톡 튀는, 춘추전국시대형 謀士는 사라졌으면…….
경기중고등학교는 1956년 2월에야 묵었던
옛터전 花洞언덕으로 복귀완료하였다. 따라서 그 다음해에 부임하신 교장선생님께서는 학교 건물의 수리, 담 보강, 학생도서관의 개관, 음악당과
미술관의 건립, 공작실의 확충, 과학교육 기자재의 발주 등 엄청난 일을 하셨다. 관련된 재원확보에 노심초사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장선생님께서는 교육자이시면서도 현재 풍미하고 있는, 탁월한 경영능력을 보여 주신 것 같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께서는 과외활동을 제외하고는 미국식
중등교육, 즉 학생들에게 과목선택의 자유를 다소 부여하는 새교육(?) 도입에는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틀에 꽉 짜인
엘리트 교육을 좋아하셔서, 앞에 언급한 대로, 일률적인 교과과정이 中 1~3에 걸쳐 동일하게 시행된 것 같다. 더욱이 전임 조 교장선생님께서
1956년에 배포하신 花洞心法을 철저히 이행하도록 하셔서, 2회 유급하게 되어 花洞언덕을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떠난 친구에게 내 졸업기념
버클을 주어 나는 중학교 버클을 가지고 있지 않다.
智育과 관련하여 면학분위기의 독려에 이어 예술활동을 장려하신 교장선생님의 은덕으로,
밴드반원의 맹활약은 물론 신현익 선생님의 독창회도 있었고 최경한 선생님[서울여자대학교 교수]이 지도하신 미술반에서도 미적 감각을 익힌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예습과 복습을 강조하셨는데 “습”발음이 나에게는 간혹 “십”에 가깝게 들린 것 같다. 首邱初心이었을까?
글쎄……. 자상하셔서, 주위가 청결하도록,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을 때는 뒤에 주먹크기 정도 띠울 것을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깨끗함을
강조하셔서인지 겨울에 양말을 벗게 하여 때 검사를 한 선생님도 있었다. 키가 크시고 미남이신 교장선생님께서는 우리도 멋지게 보이도록 바지의 옆
주머니를 없애 손을 넣지 못하게 하셨으며 여름에 스포츠 머리 위에 야구모자를 쓰고 다니게 하신 적도 있었다. 다박머리를 벗어났어도 나에게는
골목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빵떡 모자를 쓴 여학생(창덕여중생)조차 한번도 미소를 짓지 않았다.
교장선생님께서는 智育과 德育에 영화를
최대한 활용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본 영화는 단성사에서 상영된 "Mountain (山)"으로, Spencer
Tracy가 형, Robert Wagner가 동생으로 출연하였다. 그 내용은 등반 안내인인 형제가 눈에 덮인, 높고 험한 산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홀로 생존한, 보석 코걸이까지 한 인도 미인을 구출하는 것이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져 여인의 보석까지 탐하게 된 동생은, 事必歸正으로, 결국
죽게 된다. 여하튼 우리의 주인공인 형은, 천신만고 끝에, 중상으로 거동을 못하는 여인을 구출한다. 41년 전에 본 영화이므로, 대부분의 장면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위에 쓴 줄거리가 맞는 것 같은데……. 공연히 이 여인이 지니고 있는 보석 중에 다이아몬드(金剛石)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이를 확인하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라면, 京畿高의 여정이 이 여인의 여정에 비유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아몬드는, 학교 배지, 이름표, 없어진 중학교의 반장․부반장 배지 속의 하단문양을 통하여, 경기중고의 상징물로 부각되고 있으니까.
교장선생님은 여인을 완치시키려는 의사 중 한 분? 그렇다면 비행기 추락은 6.25에 해당될 것 같다. 여하튼 단성사, 중앙극장, 대한극장에서
적지 않은 영화들을 단체 관람하였는데 개봉전의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급기야 학교 강당에 영사기와 스크린을 설치하게 되어 교장선생님과 함께
즐겁게 교내에서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全人敎育에 필요 불가결한 요소인 體育은 건강과 위생측면을 제외하고는
교장선생님께서, 智․德育에 비하여, 다소 소외시하신 것으로 느껴진다. 승마, 빙구를 포함한 빙상운동, 수영, 정구, 유도, 펜싱, 즉 이
당시에는 비교적 고급운동인 종목들이 과외활동으로 부각되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대한소년단 서울․경기연맹 하이킹경기대회에서의 우승과 빙구, 즉
요즈음 떠들썩한 아이스하키의 경기중팀 연속 우승이다. 후자의 경우, 교장선생님께서는 거의 시합경기마다 참관하시어 열렬한 응원을 하신 후 우승팀을
한일관(종로에 소재)에 데리고 가셔서 직접 식사대접을 하시면서 크게 격려하셨다고 한다. 이는, 그 일원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대철 군[하늘말
농장주]의 전언에 의하면, 관련 선수들이 대부분 교과목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란다. 예를 들어, 1959학년도 중3 선수들 9명 중, 주장이었던
주정상 군[미국 Revco Industries Inc. 사장]을 포함한 8명이 후일 서울대에 진학하였다. 유감스럽게 폭력사태도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서울중학교 팀과 시합 시에 주 군이 상대편 선수에게 얻어 맞아서 입원하여 28바늘을 꿰맸다고 한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입원한 주 군을
위로차 연일 방문하셨고 덕분에 주 군은 빨리 퇴원할 수 있었다. 대를 이어 여전히 빙상운동을 좋아하는 京畿人이 각종 경기에 입상하는 것을 보면
매우 자랑스럽다.
위에 기술한 내용 중 영화와 체육 분야 외에는 많은 부분을 남겨진 기록에 의존하여 각색한 것이다. 적지 않은 기록이
남아 있는 이유는 바로 교장선생님께서 경기중고에 문학 中興을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학교 교지인 “京畿”는 중학교 2학년 시절, 즉 개교 58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창간된 것이다. 창간 제1호는 교지통권 제 42호이다. 이때 “週刊京畿”는 지령 100호에 이르게 되었고 "The
Kyunggi Youth"라는 영어신문의 발행빈도도 높아졌다. 덕분에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글의 청탁을 받고 나를 추천한
최승은 군[치과의사]의 부탁 때문이긴 하지만. 나는 교장선생님께서 집필하신 세 편의 글들, 즉 京畿 創刊号(1958. 10. 25)의 “奉仕의
精神”, 週刊京畿(1958. 2. 28/5. 5)에 각각 실린 “世界的 人物이 되라”, “金剛石과 落落長松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읽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었다. 이 글에 내 성적, 가족이야기를 가미시킨 것에 대하여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초점이 벗어난, 앞의
이야기들을 미리 읽은 내 마누라와 부부싸움이 일어날 뻔하였다. 싸워야 내가 이길(?) 것이 명약관화하지만. 경기도 연천군 마지막, 제일의 지주님
장녀로 태어나셔서, 내가 좋아하는 나지막하고 어여쁜 山처럼, 연약하였던 나를 항상 깊은 사랑으로 감싸주셨던 내 어머님께서도 1992년에
타계하셨는데 이제 내가 내 자랑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울대학교 개교기념일인 10월 15일에 이 글의 말미를 장식하기 위하여
배낭을 짊어지고 사직공원, 仁王山, 병자호란시 청에 붙잡혀간 김상헌의 집터, 청와대, 경복궁 신무문, 국무총리관저를 거쳐 花洞언덕을 다시
방문하였다. 仁王山과 경복궁 돌담길에서 제법 경비원들의 환대를 받은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경기상업고등학교 근처에서 넥타이를 매고 배낭을 멘
양복형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만났다. 나는 가방을 들고 다녔고 넥타이 착용은 꿈도 못 꾸어 보았는데……. 내가 이 학생들과 같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우리나라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대부분은 같은 나이에 과외에 시달리지 않아 꿈은 더 많지 않았나 생각된다. 과외수업(?)과 입시지옥에서
시달릴, 이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교장선생님께서 경기중고등학교에 처음 부임하셨을 때의 연세는 지금의 나보다 한 살 적으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예전의 교문에 당도하니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의 집터 안내문비석이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 그 뒤에 竹林은 여전하나 도서관은 서울교육사료관이 되었고 교장 관사는 찾지를 못하였다. 교실이 있던 건물들은
그대로였으나 교장선생님께서 건립하신 음악당은 식당이 되었고 미술관은 접근할 수 없도록 길이 폐쇄되어 있었다. “민주혁명학생 위령비”는
그대로였다. 예전의 운동장 가운데에는 17세기의 조선화가 정선이 仁王山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그림을 그대로 모사한 그림을 위에 매달고 있는,
큰 石碑가, 1992년 6월에 문화부[문화관광부]에 의하여 세워져 있었다. 이 그림은 바로 비 위치에서 본 仁王山의 옛날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림 속에도 仁王으로 적혀 있는 것을 문화부는 비 밑에 있는 설명문 속에 仁旺으로
음각한 것이다. 이는 조속히 仁王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仁王山 밑 포장도로변을 거닐다 보면 이 산의 이름에 대한 내력을 설명하고 있는
안내판을 보게 된다. 이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일본 왕이 조선 왕을 누른다는 의미에서 인왕의 왕을 旺으로 쓰게 하였다고 적혀있다. 옛 조선지도들
중에 旺으로 표기된 仁王山은 본 적이 없다. 이 비의 설명문 같이 전통을 복원하면서 진실을 왜곡하는, 더욱이 외국문물을 도입하여 부분적으로
국내에 잘못 이식하는, 한심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은 이상 우리는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다. 나는 비문의 잘못을, 서울특별시립 정독도서관의
서무과 직원을 불러내어, 바로 비 앞에서 알려주었다. 올바른 의미의 溫故知新 정신이 머리 속에 배어 있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정확한 기록정신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흥 분하여, 초목과 벤치들이 질서정연하게 있는 도서관 정원을 빠져 나오는 도중 내내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김원규 교장선생님을 아련한 추억 속에서 그려보면서, 선생님의 소망이 花洞언덕에서 생전에 이루어졌다면 우리나라의
국제화가 훨씬 앞당겨졌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갑신정변의 지도자인 김옥균의 집터에서 꿈을 꾸셔서 선생님의 의욕이 三日天下로 끝났다고 하면,
선생님께서는 그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語不成說. 엉터리 풍수지리설에 선조 탓까지 가미시킨 유언비어를 날조하려
하다니……. 登高自卑를 터득하신 선생님께서, 結者解之를 못하시고 花洞언덕을 떠나신 후 應天順人의 길을 가시다가, 1968년 12월 10일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 교장으로, 실습교육 시찰차, 일본을 방문중에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 너무나 애석하다. 마지막으로 몸담으셨던, 이
학교는 연이어 경기공업전문학교, 경기공업개방대학, 서울산업대학으로, 마침내 서울산업대학교로 개명이 되었고, 현재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나는 이곳에서 서울대 화학공학과의 학생(1963. 3-1967. 2), 또한 조교수(1978. 3-1980. 1)로 지냈다. 내가 한 살 때부터
20여년동안 뛰놀았던 넓은 집은,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룸아파트가 되었고,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전면적으로 개명이 되었고,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없어졌고,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는 공업화학과와 통합되어 응용화학부로 개명이 되었다. 개명이 일어난 앞의 두 학교는 물론 京畿高도
이전하여 셋 다, 또한 내 집도 현재 서울의 4대문 밖 멀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도 桑田碧海라는 말이 해당되나? 이름을 바꾸고 이전만
하면 새교육인가? 머리가 혼란스럽다. 花洞언덕에서 1900년 10월 3일 개천절에 개교한 京畿高等學校여! 부디 너만이라도 김원규 교장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三成洞 언덕에 굳게 뿌리를 내려서 오는 21세기에 세계 굴지의 고등학교로 발전하여 나아가라! 다시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끝마치겠다.
後記 : 山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김유영 군[서울대 내과 교수]의 조언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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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책과 면)
김원규, 다시 태어나도 교육을, 362-367면, 화인기획(1998)
[편집인: 2남 김영민(서울고
졸업)].
(1999년 3월 23일)
위의 글은 김영환 회장(경기 62회: 교장선생님의 3남)의 서신 요청에 따라
썼으나 일부 보낸 글의 내용과 달라졌고 사전 동의없이 보낸 글 중 40%정도를 없앴음. 사실 김평일 원장(경기 60회: 치과의사)의 글을 보고
경쟁심이 유발되어 길게 쓴
것임.
- 다음 해동 열람자료 ㅡㅡ
- 이전 삶에 귀감이 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