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현실정치에 메시아는 없다

작성자
최창균
작성일
2011-12-03
조회
893



현실정치에 메시아는 없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chdsun.com 메신저입력 : 2011.11.27 23:08

 

피렌체가 프랑스 침략에 흔들릴 때 지배층 무능 질타로 구세주 떠오른
수도사 사보나롤라, 집권 몇 년 만에 失政으로 민중 손에 화형 처해져…
준비되지 않은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공동체에 엄청난 재앙 될 수 있어
 
 

수도사 사보나롤라(G. Savonarola·1452~ 1498)가 피렌체의 정치에 혜성같이 등장한 건 1494년의 일이었다. 강대국 프랑스가 쳐들어온 것이다. 상비군(常備軍)이 없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르네상스의 고향인 피렌체의 운명도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찬란했던 피렌체를 이끈 메디치 가문도 '위대한 로렌초'(1449~1492)의 죽음과 함께 시들어간 지 몇 년이 된 시점이다. 당파싸움에 찌든 정치, 타락한 교회, 사회적 부패의 암울함이 온 나라에 퍼진 상황에서 파국은 불가피해 보였다. 프랑스의 침략이 그 증거로 여겨진 건 물론이었다.

 

사보나롤라는 그 몇 년 전부터 불 같은 설교로 민중의 인기를 끌었다. 금욕과 헌신의 삶을 살았던 그는 부패하기 짝이 없던 교황을 질타하는 데 앞장섰다. 상류층과 정치권의 무능을 꾸짖던 '시대의 멘토'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위기 앞에 감연히 나서 프랑스 왕과 담판을 벌였다. 협상을 통해 살육과 약탈을 미연에 방지한 사보나롤라는 단번에 피렌체의 구세주가 되어 환호하는 시민들의 지지를 업고 인민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현실정치는 냉혹했다. 아마추어 지도자의 도덕주의와 실정(失政) 아래 피렌체 시민들은 빠르게 지쳐갔다. 경제가 위축되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민중의 염증은 급격한 민심이반으로 이어졌다. 집권 4년 만인 1498년에 실각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청 광장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그를 정치적 메시아로 떠받들던 바로 그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였다. 청년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새 정부의 서기장관이 되어 출근한 첫날, 사보나롤라의 화형식 광경을 시청에서 내려다본다. 희대의 문제작 '군주론'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의 풍경은 15세기 피렌체와 얼마나 다른가? '87년 체제' 이후 국민의 손으로 뽑힌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는 예외 없이 초기의 열광적 지지와 후기의 총체적 민심이반으로 얼룩졌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도 마찬가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극적 죽음을 통해 지금은 '부활'했지만, 실상 그의 임기 말에는 민심의 이탈이 극심했다. "모든 게 노무현 때문이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떠나간 민심이 최대 표차의 정권교체를 낳고 친노(親盧)인사들이 폐족(廢族)을 자임했던 게 불과 4년 전의 일이다.

 

정치리더십에 대한 과잉기대와 과잉환멸의 비극적 이중주는 한국민주주의의 특징이 되었다. 요즈음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도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야"를 실감케 할 정도로 심하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모두 여론이 화형대에 몰아놓은 형국인 것이다. 물론 민심이 떠나간 가장 큰 이유는 대통령과 정부여당에 있다. 그러나 그게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게 대중민주주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고 칭송되는 여론의 힘은 민주주의의 생명이지만 동시에 아주 변덕스럽고 무책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수결 여론정치인 민주주의에 포퓰리즘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내재한다는 역설(逆說)과 맞물린다.

 

'안철수 현상'의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환멸이 자리한다. '성공했지만 불공정한 이명박'과 '성공과 공정성을 다 갖춘 안철수'의 대비가 그것이다. 여기다 이명박 정부의 불통(不通) 이미지와 안철수 특유의 소통 능력이 더해질 때 안철수 돌풍은 예비된 거나 다름없다. 결국 '안풍(安風)'은 우리 모두 애타게 바라지만 손에 잡히진 않는 집합적 소망의 결집체인 것이다.

문제는 '안철수 현상'이 정치적 메시아주의로 부풀려질 때 생긴다. 설령 정치적 구세주라 해도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현실정치의 난장(亂場)을 제대로 다룰 수는 없다. 메시아 대망론에 업혀 정치적으로 '벼락출세'한 지도자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최악의 경우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공동체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는 안철수 교수가 정말로 정치에 뜻이 있다면 하루빨리 현실정치에 참여해 능력을 검증받고 통치의 자질을 닦는 훈련과정을 거쳐야 함을 뜻한다.

 

얼마 전 가 본 피렌체 시청 앞 광장은 인파로 넘쳤지만 사보나롤라가 십자가에 화형당한 바닥에 새겨진 기념동판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마키아벨리를 전율시킨 화형의 현장인 시뇨리아 광장은 마치 "정치에는 메시아가 없다"고 절규하는 듯했다. 질풍노도의 변화가 기다리는 '2012년 한국'의 모습이 그 안에 녹아있었다.

전체 0